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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혁명의 불꽃인가, 어둠의 심연인가
작성자 : 조현숙 작성일 : 17-08-02 | hit : 2655

로베르트: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불꽃인가, 어둠의 심연인가 (2)

“우리의 혁명이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리라”

1791년경 로베스피에르의 모습, 루이 레오폴 부알리.

1791년경 로베스피에르의 모습, 루이 레오폴 부알리.

‘부패할 수 없는’ 로베스피에르

1791년 9월 30일 제헌의회는 헌법 제정이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임기를 마쳤다. 의원들은 행렬을 이루어 퇴장했다. 이제 다음 의회는 헌법이 규정한 절차에 의해 새로이 구성된 의회로, 헌법이 아니라 법을 제정하는 ‘입법의회’가 될 것이다. 10월 1일, 미리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입법의회가 처음 소집되었다. 이 의원들은 누구일까?

로베스피에르는 다섯 달 전인 5월 16일에 아주 중요한 조치를 취해놓았다. 현직 의원들은 다음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법령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는 현재 의원들 대부분이 부패해 있고 특권층과 타협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우리부터 먼저 특권을 내려놓자는 제안에 대해 의원들이 흥분 상태에서 승인했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자신들의 앞길을 스스로 막아놓은 셈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 회의 때 내용을 수정하여 바로 다음 선거에서만 선출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하여튼 제헌의회 의원들은 입법의회 회기 2년 동안은 등원할 기회가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열정적인 신인들이 많이 등장해 정치 변화를 가속화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제도는 우리나라에 한번 도입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현직 의원들이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희망 국회 건설 법안’ 같은 것 발의할 사람 누구 없나…….

로베스피에르 역시 의원 자리를 내놓았지만, 그렇기에 민중 세력과 결탁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자코뱅 클럽에서 ‘우리는 의회 안에 남아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나라에 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실제로 보수 인사들이 스스로 나간 뒤라 그로서는 더욱 탄력을 받아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다.

모리스 뒤플레의 집. 수도 바로 위의 2층 방이 로베스피에르가 살았던 곳이다. 작자 미상, 18세기경.

모리스 뒤플레의 집. 수도 바로 위의 2층 방이 로베스피에르가 살았던 곳이다. 작자 미상, 18세기경.

이 시기에 로베스피에르는 생토노레 가에 위치한 모리스 뒤플레(Maurice Duplay)라는 목수의 집에 방 하나를 얻어 하숙 생활을 했다. 궁전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며 왕처럼 살았던 다음 시대 영웅 나폴레옹과는 확실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는 자신이 받는 의원 세비로만 생활했고, 공적 지위를 이용해 사적 이익을 얻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부패할 수 없는(Incorruptible)’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또한 로베스피에르는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으며, 산보와 소박한 마을 축제를 즐겼다.

혁명가로 살다간 그의 짧은 일생에서 인간적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특별히 없었지만, 그래도 굳이 한 가지 든다면 하숙집 주인 딸 엘레오노르(Éléonore)와 사랑에 빠지고 약혼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커플은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두 번의 짧은 여행을 한 것 말고는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가난한 노총각 하숙생으로 소박하게 살았다. 그럴수록 명성이 높아갔고, 그의 초상화가 파리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그런 만큼 위험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생토노레 가로 이사를 온 것도 신변의 위협 때문으로, 가급적 의회와 자코뱅 클럽 가까이 있고 싶어 했다.

새로 구성된 입법의회의 다수파는 앞으로 지롱드파(Girondins)로 불리게 되는 부르주아 당파였다. 이들은 구체제와 관련이 없어 특권층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고, 급진적인 혁명 이념을 유지한 채 반혁명 음모와 치열하게 싸울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자코뱅 세력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계급 이익을 결코 놓치려 하지 않으므로, 민중 세력과는 입장이 갈릴 수밖에 없었고 로베스피에르가 대변하는 정치 세력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지롱드파는 민중들을 무력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이익을 옹호할 의사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들이 생각한 방안은 전쟁이다.

“누구도 무장한 전도사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주변 국가들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 번져올 것이 두려워 전쟁을 벌여서라도 막고자 했다.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유럽 군주들에게 무력 사용을 촉구하는 소위 필니츠 선언을 했다. 혁명 정부는 이와 같은 외부의 위험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선서 거부파 사제와 망명귀족 등 반혁명 세력의 위험도 크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롱드파는 차라리 전쟁을 통해 민중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 혁명을 수출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여건이 나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전쟁에 찬성할 것인가, 민중세력과 연합할 것인가 같은 문제를 놓고 자코뱅 클럽 내에서도 브리소파(지롱드파의 맹아)와 로베스피에르파(산악파의 맹아)의 두 파가 나뉜다. 로베스피에르는 처음에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전쟁에 찬성했지만, 곧 국왕 측이 전쟁을 이용해 권력을 되찾으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국왕 측은 군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진압할 수도 있고, 혹은 아예 프랑스가 전쟁에 패하여 혁명 정부가 무너짐으로써 구체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전혀 근거 없는 추측만은 아니다). 마라를 비롯한 급진파는 전쟁에 반대했고, 곧 로베스피에르 역시 여기에 동의했다. 그는 무력을 통한 혁명 수출이라는 허구도 비판했다.

누구도 무장한 전도사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 인권선언은 모든 왕관을 동시에 내려치는 벼락이 아니다. 우리의 혁명이 언젠가는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오늘 일어날 일은 아니다.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전파가 승리하여 1792년 4월 20일 의회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인물은 라파예트였다. 로베스피에르에게 이 시기 최대의 적은 라파예트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 클럽에서 아홉 차례나 연단에 올라 라파예트가 자유와 조국의 적이라며 비판했다.

전쟁을 지지하며 로페스피에르와 대립한 라파예트. 조제프 데지레 쿠르, 1834.

전쟁을 지지하며 로페스피에르와 대립한 라파예트. 조제프 데지레 쿠르, 1834.

얼마 후 로베스피에르는 《헌법의 수호자(Le Défenseur de la Constitution)》라는 자신의 신문을 창간하고 이 지면을 통해 날선 비판을 했다. 브리소파와 푀양파가 혁명을 독점하며 민중을 경멸한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라파예트는 자코뱅 클럽의 폐쇄를 요구했다.

전쟁과 내전, 혁명과 반혁명의 격한 갈등이 휘몰아쳤다. 입법의회는 선서 거부파 사제를 축출하자는 결의를 했는데, 국왕이 비토권을 행사했다. 급진파는 국왕을 폐위하고 의회를 민중의 의지에 복속시키자는 과격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2만 명의 의용병이 ‘파리 연맹군’을 결성했다. 이제 혁명의회는 자체 무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간의 토론 끝에 7월 11일 의회는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선언했다. 국가가 비상사태에 처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왕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긴급조치들을 공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상황은 갈수록 긴박해졌다. 프랑스군이 전쟁에서 계속 밀리는 한편, 라파예트는 혁명 세력을 군대의 힘으로 분쇄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7월 25일에는 프로이센의 장군 브라운슈바이크가 만일 루이 16세가 사소한 모욕이라도 당하면 파리를 완전히 파괴해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전국의 연맹군(말하자면 혁명을 지지하는 의용군)이 파리로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유 연맹군이 행진하며 부른 군가 <라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프랑스 수호를 위한 대표적인 혁명 가요로 굳어졌고, 1795년 국민공회가 국가(國歌)로 공표했다.

파리 개선문에 새겨진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출정하는 의용병들의 조각.

파리 개선문에 새겨진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출정하는 의용병들의 조각.<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 Siren-Com>

7월 29일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은 바로 이런 흐름과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를 구해내야 합니다. 국가의 파멸을 지향하는 것만이 헌법을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위급 상황에서 국가를 구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헌법 위반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제 그는 국왕을 폐위하여 공화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의회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로베스피에르의 구상을 정리하면 이렇다. 국왕이 제 기능을 못했으므로 폐위시켜야 마땅한데, 현재의 의회는 그런 과업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참에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새 의회를 짜야 한다. 의원을 새로 뽑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의회를 만들되, 그것은 단순히 법률을 제정하는 의회가 아니라 다시 새 헌법을 만드는 의회여야 한다. 그리고 이전 의회의 의원들은 민중의 의지를 배신했으므로 이들을 다시 뽑아서는 안 되며, 직접 보통선거로 새 의원들을 선출해야 한다. 이것이 소위 국민공회(Convention)다. 이 기구를 중심으로 반혁명적 지방 기구들과 군도 쇄신해야 한다. 이상의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민주적인 새 헌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의 힘을 동원하여 다음 단계의 혁명을 주도하면서 이 강령을 실현해나가게 된다.

전쟁과 반혁명: 위기를 맞는 혁명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각 구(區) 대표들이 시 청사에 모여 ‘봉기 코뮌’을 결성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피크 구 의회에 참석하여 코뮌의 대표로 지명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민중 세력을 동원하여 의회를 압박하고 정세를 주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중들은 곧 튈르리 궁을 습격하여 함락하고 왕실을 탕플의 옛 기사단 건물에 감금했다.

1792년 튈르리 궁을 공격하는 민중 세력. 장 뒤플레시 베르토, 1793.

1792년 튈르리 궁을 공격하는 민중 세력. 장 뒤플레시 베르토, 1793.

이날 밤 의회는 국왕의 권한 정지를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1791년 헌법의 효력이 정지되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가 요구한 국민공회 소집도 받아들여 모든 남성 시민들(여성은 제외되었다)의 선거를 통해 새로 의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라파예트가 기다렸다는 듯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파리로 진군하려 했지만, 병사들이 그의 명령을 거부하자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 오스트리아는 다급하게 그를 투옥했다.

민중 세력이 본격적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예전에(1791년 5월 10일) 로베스피에르는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 허용해야 한다고 연설한 바 있지만, 이제는 왕당파 신문들을 폐간시켰다. 지금은 전시라 예외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푀양파 각료들에 대한 체포 영장도 발부했다.

그뿐 아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범법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민중재판소 설치를 강행했다. 구(區) 선거인들이 판사 지명 작업에 착수했을 때 당연히 로베스피에르를 1순위로 지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로베스피에르는 코뮌 대표 직무를 하면서 판사 일을 함께 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조만간 민중들이 직접 행동에 나서 피비린내 나는 범법자 즉결 처형, 이른바 9월학살을 벌인다. 만일 로베스피에르가 판사직을 수락하고 법에 따라 재판했다면 그런 비극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파리의 상황은 폭발 직전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이 진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파리를 완전히 부셔버리겠다고 장담한 프로이센군의 도착도 멀지 않아 보였다. 이런 판국에 프랑스 서부의 방데 지역을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에 반혁명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혁명의 성과가 한방에 훅 날아갈 수도 있어 보였다.

코뮌은 이 모든 위험에 대해 스스로 무장하며 준비하기로 결의했다. 대규모로 의용군을 모집했고, 며칠 만에 3만 개의 창을 제작하고 참호도 팠다. 혁명을 저해할 혐의자들을 찾아낸다며 가택을 수색해 3,000여 명을 체포했다.

1972년 파리 그랑 샤틀레에서 일어난 학살을 묘사한 그림으로, 그해 9월 반혁명범법자 즉결 처형이라는 명목 하에 대학살이 벌어졌다.

1972년 파리 그랑 샤틀레에서 일어난 학살을 묘사한 그림으로, 그해 9월 반혁명범법자 즉결 처형이라는 명목 하에 대학살이 벌어졌다.

9월 2일, 베르됭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코뮌은 건강한 남자들은 전부 샹드마르스 연병장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모두 애국적 흥분 상태에 휩싸였다. 의용군이 전쟁터로 출발하기 전에 내부에 숨어 있는 위험 요소부터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군중들은 감옥으로 달려가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혐의자들, 곧 사제, 수녀, 귀족 혹은 반혁명과는 별 관련 없는 좀도둑, 창녀 등을 끌어내서 목을 치는 방식으로 즉결 처형했다. 5일 동안 약 1,000~1,4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로베스피에르가 이 일을 지시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그와 같은 방향의 연설을 했고, 지나치게 과격한 현상에 대해 유감을 표했을 뿐 전반적으로는 반대하지 않았다. 학살의 와중에 로베스피에르는 정적 브리소를 비판하여 제거하려 했지만, 이때는 페티옹과 당통이 개입하여 브리소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냉혹한 정치 지도자로 변모해갔다.

공화국의 탄생

1792년 9월 20일이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이날 혁명군은 발미(Valmy)에서 프로이센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를 직접 목격한 괴테는 “오늘, 이곳으로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같은 날, 파리에서는 국민공회가 소집되어 사무국을 선출했고, 곧바로 프랑스 왕정 폐지를 선언했다. 프랑스의 제1공화정이 시작된 것이다.

발미 전투. 오라스 베르네, 1826.

발미 전투. 오라스 베르네, 1826.

국민공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1위로 당선되었을 뿐 아니라 선거 과정에 깊숙이 간여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이 대거 의원으로 선출되게 했다. 전체 의원 760명 중 약 200명 정도 차지하는 이 사람들은 의회 내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아 ‘산악파(Montagnards)’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들과 대립하는 지롱드파는 약 160석 정도를 치자했다. 중도파라 할 수 있는 나머지 약 400명은 의회의 낮은 곳에 주로 모여 있어서 ‘평원파’라 불린다. 산악파와 지롱드파로서는 이 평원파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대세를 장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국민공회는 개시 후 곧바로 격한 정치 싸움에 들어갔다. 우선 지롱드파가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세 사람이 삼두정(triumvirate)을 이루어 권력을 잡고 자유를 질식시켰다고 고발했다. 9월학살을 주도하거나 방치했다는 비난도 가해졌다. 그러나 마라와 로베스피에르가 반박하는 연설을 하여 산악파를 열광시키고 중도파를 끌어와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혁명 의회의 분위기는 대체로 살벌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등단하면 산악파 의원들이 갈채를 보내고, 의회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 자코뱅 클럽 사람들이 혁명가요를 부르며 뒤를 따랐다.

국민공회가 다루어야 하는 첫 번째 중요 이슈는 국왕의 처리 문제였다. 공화정을 선언한 이상 국왕은 불필요한 존재인데, 이를 어떻게 하는 게 좋단 말인가?

생쥐스트가 급진파의 견해를 제시했다. ‘국왕이 적으로서 재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격파들의 견해에 따르면, 국왕은 이미 8월 10일 봉기 당시 민중들이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재판조차 필요 없다, 말하자면 그냥 죽이자는 의견이다. 로베스피에르도 같은 생각이었다. 국민이 이미 판결을 내렸는데 다시 재판에 회부하는 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루이는 자신의 죄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 루이는 이미 재판받았고 유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루이 16세를 재판하는 것은 혁명 자체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

사실 그는 사형반대론자였고 과거 의회 연설에서도 그 점을 강하게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열한 차례나 발언대에서 루이의 사형을 요구했다.

국민공회에서 국왕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는 장면. 작자 미상, 18세기.

국민공회에서 국왕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는 장면. 작자 미상, 18세기.

결국은 재판에 회부하자는 페티옹 안이 채택되었다. 재판은 의회 내 투표로 정하는 방식이었다. 투표 결과 707대 0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사형 여부에 대한 1차 투표는 387대 334, 수정 표결의 결과는 361대 360으로 사형 언도가 내려졌고(한 표 차로 국왕의 목숨이 날아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실제 사형을 집행할지 집행을 유예할지를 놓고 투표한 결과 380대 310으로 사형 집행이 확정되었다. 다음 해인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기요틴으로 처형당했다. 국왕의 죽음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국왕 처형 이후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의 위세는 상승한 반면 지롱드파는 하락했다. 그러나 혁명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 법.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는 파리 민중들은 혁명 정부에 경제 문제를 해결해달라며 자주 봉기를 일으켰고, 지롱드 내각은 이런 사람들을 체포했다. 민중 세력은 정부에 압박을 가해서 민주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손 봐야 할’ 지롱드파 의원들 목록을 전달했다.

콩코드 광장에서 숙청당하는 지롱드파 의원들. 《1793년의 단두대》(헥토르, 플라이쉬만, 1903)에 실린 삽화, 18세기.

콩코드 광장에서 숙청당하는 지롱드파 의원들. 《1793년의 단두대》(헥토르, 플라이쉬만, 1903)에 실린 삽화, 18세기.

민중의 동력을 등에 업은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 클럽에서 ‘부패한 의원들에 대항하는 봉기’를 선동하는 연설을 했다. 상퀼로트(sans-culotte, 과격 공화파 시민, 과거 귀족들 의상인 짧은 바지culotte를 입지 않고 대신 긴 바지를 입은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는 봉기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민공회를 압박했다. 1793년 6월 2일, 무려 8만 명의 무장 상퀼로트들이 의회 건물을 둘러쌌다. 의원들이 도주하려다가 총을 든 시위대에 막혀 건물 안으로 돌아와서는 할 수 없이 29명의 지롱드파 의원의 체포를 결정했다. 의원들은 이제 파리 목숨이 되었다.

■ 주경철 저자의 출간 도서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1

[네이버 지식백과]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불꽃인가, 어둠의 심연인가 (2) - “우리의 혁명이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리라” (서양근대인물열전)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612920&cid=59133&categoryId=5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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