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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를 넘어선 역사, 지금이야말로 절실'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16-04-21 | hit : 1021
[경향신문]ㆍ버거 교수 등 ‘라이팅 더 네이션’ 주요 편집자들 포럼 위해 내한
2004년 10월, 네덜란드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는 영화로 이슬람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무슬림 청년에게 살해됐다. 사건 직후 네덜란드에선 모스크 방화 등 반이슬람 정서가 확산됐다. 반이슬람 정서는 네덜란드 국사(National History) 교육으로도 향했다. 극우정당은 “국사 교육을 강화하고, 이민자들에게 네덜란드의 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사와 민족주의는 상호작용한다. 국사 교육·서술이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때론 강한 민족주의가 국사 교육·서술의 방향을 이끈다. 국사를 둘러싼 국가 갈등은 흔히 한·중·일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식하기 쉽지만, 유럽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가 ‘국사’를 넘어서는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의 가능성 등을 모색하기 위해 ‘라이팅 더 네이션’ 리뷰 포럼을 마련했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와 포럼 참석차 방한한 독일 보훔 루르 대학의 크리스 로렌츠 교수, 라이프치히 대학의 프랭크 하들러 교수, 보훔 루르 대학의 스테판 버거 교수(왼쪽부터)가 한자리에서 만났다.
유럽에서는 국사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국사를 넘어서’(Beyond the National History)란 프로젝트가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넘게 진행됐다. 유럽 29개 국가 역사학자 250명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그 결과물로 ‘라이팅 더 네이션’(Writing the Nation) 시리즈를 지난해 7월 9권 완간했다. 학자들은 시리즈에서 1750년부터 현재까지 250년에 걸쳐 유럽에서 국사가 어떻게 서술돼왔고, 국사 서술이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등을 살폈다. 국사 중심 패러다임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 것이다.
‘라이팅 더 네이션’ 시리즈 주요 편집자들인 독일 보훔 루르 대학의 스테판 버거 교수(52)와 크리스 로렌츠 교수(66), 라이프치히 대학의 프랭크 하들러 교수(54)가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 초청으로 방한했다. 지난 19일 이들을 강원 횡성의 임지현 서강대 교수(57) 연구실에서 만났다.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장인 임 교수는 10여년째 이들과 학문적 교류를 이어왔다.
시리즈 총편집자인 버거 교수는 “19세기 근대 역사학 태동기부터 계속된 국사 중심 교육과 서술은 민족 간 갈등을 부추기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로렌츠 교수는 알바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 등 여러 민족이 뭉쳐 있는 코소보의 사례를 들었다. 그는 “이곳 학생들은 국사 수업만은 민족별로 따로 받아 타민족의 침략과 수탈, 여기에 맞선 자민족의 대응 등 서로 다른 내용으로 역사를 공부한다”며 국사 교육이 민족에 따라 서로를 증오하도록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버거 교수는 “국사 중심 패러다임이 얼마나 강력한지 또 얼마나 위험한지를 시리즈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나라를 중심으로 역사를 써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모든 역사의 기본으로 생각하는 ‘역사쓰기의 민족주의’는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 학자들은 국사 중심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를 제안한다. 국사 중심 패러다임이 자국의 영광과 고통에 주목한다면,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중심으로 삼는다. ‘평화박물관’으로 불리는 독일 드레스덴 군사박물관이 그 사례다. 버거 교수는 “이 박물관은 전쟁으로 인한 모두의 고통을 이해하도록 하고,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피할 수 있을까를 강조한다”고 말했다.
국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의미를 폭넓게 고찰할 수 있다는 것도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의 장점이다. 하들러 교수는 “미국 남북전쟁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는 바람에 이집트의 많은 면화재배 농민들이 파산했다”며 “국가 단위로 역사를 잘라서 보면 남북전쟁이 멀리 이집트 농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많다. 유럽 통합이 확대되면서 오히려 자국 정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국사 중심 패러다임을 강화하고 있다. 역사적, 지정학적 여건에 따른 동·서유럽 간 관점 차이가 작지 않고, 경제 위기와 반이슬람주의, 난민 문제 등도 악재다. 그러나 이들 학자들은 “이럴 때일수록 국사를 뛰어넘는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로렌츠 교수는 “유럽 내 이주민 문제 같은 경우도 지금과 달리 접근할 수 있다”며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대규모 이민은 고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나 유럽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의 미국 이주 등에서 보듯 새로울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버거 교수는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의 관점이 민족주의를 중화하는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다른 편집자들과 함께 23~24일 서강대에서 열리는 ‘라이팅 더 네이션’ 리뷰 포럼에 참가해 발표하고, 한·일 학자들과 토론하며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임 소장은 “이번 포럼은 우리보다 앞서 공동의 역사를 고민해온 유럽의 경험을 듣는 자리”라며 “국사 중심 패러다임이 강한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계에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