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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데 읽기·쓰기 힘들어하면 ‘난독증’ 의심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13-07-13 | hit : 3002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김중훈 교사(40·인천 간재울초)에겐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전교생 700~800명 앞에서 선도반장 자격으로 주훈을 발표하던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조회시간. 땀을 뻘뻘 흘리며 주훈을 읽었는데, 전교생이 일제히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단상에서 내려오자 담임선생님은 “6학년이나 돼서 그까짓 몇 줄을 제대로 못 읽느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의 당혹감을 김 교사는 잊을 수 없다.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항상 책읽기 시간이 되면 차례가 오기 전에 가슴이 쿵쾅거렸고, 미리 읽어서 준비하지 않으면 실수하기 일쑤였다. 해가 갈수록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뚜렷해졌다. 조사를 건너뛰거나 잘못 읽는 것은 다반사였고, ‘왔습니다’를 ‘갔습니다’로 읽기도 했다. 시험문제를 잘못 봐서 틀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긴 지문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돼 시간 부족으로 마지막 문제들은 모두 찍었다.




초등학교 땐 ‘이해력이 부족함’이라는 통지표를 받았다. 몇몇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보면 똘똘한 것 같은데 성적이 왜 이렇게 안 나오느냐,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하라’며 안타까워했다. TV 퀴즈프로그램은 수재 수준이던 형, 누나만큼 잘 맞히면서도 성적은 잘 안 나오자 부모님은 ‘가능성은 있는데 왜 이럴까’라고 걱정만 했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는 걸 자신만 알 뿐, 부모님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인천 간재울초등학교 김중훈 교사는 난독증의 경우 가벼이 지나치기 쉬워 부모와 학교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좋은교사운동 제공


▲ “초·중·생 11만 여명 치료 필요

오디오 교과서·참고서 효과적”

토론회등 열어 정부 관심 촉구





이상했다. 역사나 사회 과목은 논리적으로 잘 얘기해 주는 선생님의 강의가 동영상처럼 그대로 기억되면서 딱히 공부할 필요도 없이 만점이었다. 그러나 긴 지문 읽기가 필요한 국어나 영어, 연산 실수가 없어야 하는 수학은 아무리 공부해도 점수가 안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 중얼중얼 소리내서 공부하면 눈으로 읽을 때보다 공부가 잘된다는 것을 깨닫고 문제집 수십권을 반복해 풀고, 지문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재수 끝에 교육대학에 진학했다.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교사였다.




교육학을 전공하며 학습부진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나서야 자신이 난독증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전문서적을 읽어보니 증상이 거의 일치했다. 난독증이란 정상 지능을 갖고 있고, 대인관계나 말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종의 학습장애다.




교사가 된 후 자연스럽게 난독증 아이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눈동자가 불안하게 왔다갔다하고 머리를 긁적이는 아이들, 읽기 속도가 너무 느리고, 시간이 부족해 시험 후엔 온몸이 땀에 젖을 만큼 긴장하는 아이들은 예전 자신의 모습이었다.




김 교사는 여전히 부모나 학생, 교사들이 난독증에 대해 모르고 전혀 대책이 없는 상황은 자신이 어렸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일부 중산층 학부모들이 아이가 왜 그럴까 답답해하며 스스로 병원을 찾아가 상담하고 답을 찾아 나섰다는 점이다. 그러나 난독증에 대한 이해가 워낙 부족하다보니 진단을 받아도 의료보험이나 맞춤교육 등 어떤 지원도 받기가 힘들다.




지난달 김 교사가 소속된 교원단체인 ‘좋은교사운동’은 난독증·소아정신과 전문의와 학부모 등을 초청해 ‘난독증과 학습부진’을 놓고 토론회를 열었다. 전문가들이 추산하는 난독증 학생 규모는 2010년 기준으로 초·중·고생 788만여명 중 11만2000~31만4000명이다.




난독증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는 카페 회원만 3000명가량 된다. 발제자로 참여한 김 교사는 “선생님들이 조금만 공부를 하면 난독증을 발견할 수 있고, 간이진단 등을 통해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효과도 큰 만큼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와 조기발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사는 “아인슈타인이나 월트 디즈니, 톰 크루즈 등도 난독증세가 있었다”며 “난독증을 학습부진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재능을 꽃피우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난독증 치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오디오 교과서나 오디오 참고서 등 보조학습기구다. 김 교사는 “들으면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는 어머니들 중엔 교과서를 모두 직접 녹음하면서 몸살에 걸린 경우까지 있었다”며 정부 차원의 지원을 당부했다. 난독증으로 진단된 아이들은 시험볼 때 시간을 더 주거나, 수행평가에서 지필보다는 말하기 형식으로 바꿔 주는 등의 조치도 큰 도움이 된다.




김 교사는 학부모가 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가 난독증세가 있는데, 말도 잘하고 한번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할 만큼 똑똑하지만 수학이나 읽기, 쓰기는 잘 못 해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남들 앞에서 창피 당하지 않게 읽기 대신 말하기를 시키거나,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교사의 이해만 있어도 큰 도움이 됩니다.”



2013. 7. 8 경향신문 송현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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