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펴낸 회사원도… 책쓰기·글쓰기책 인기, '1人 1책'으로 은퇴준비를
SK브로드밴드에 근무하는 조성기(43) 팀장은 최근 '아이디어 쿠킹'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지금까지 번역서 2권을 포함해 모두 6권의 책을 썼다. 어떻게 회사에 다니면서 책을 낼 수 있었을까. 조 팀장은 "나의 경우 아는 것을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케팅이나 애니메이션 등 업무를 하다가 생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책을 쓴다"며 "평균 2년에 한 권 정도를 썼는데 2년 동안 하나의 질문을 꾸준히 파고들 수 있다면 누구나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주부와 평범한 직장인에서 저자 및 글쓰기 강사로 변신한 강미영.정예서.한명석씨(왼쪽부터)가 서울 합정동의 북카페 및 세미나 공간인‘크리에이티브 살롱 9’에서 테이블 가득 펼쳐진 책 위에 누워 자신들이 쓴 책을 손에 들고 웃고 있다. 이들은 책 쓰기는 자신들에게“혁명이자 치유였고, 주도적 삶을 살 수 있는 변화의 계기가 되어 주었다”고 말했다. / 성형주 기자 아이들과 현장학습을 다닌 경험을 묶어 책으로 펴낸 주부들도 있다. 전지영(43)씨를 비롯한 경기도 고양시의 주부 세 명은 아이들과 함께 체험학습을 다니다가 '우리 동네에는 어떤 나무들이 살고 있을까'라는 책을 냈다. 전씨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시작해 고등학교에 들어간 올해에 책이 나왔다"며 "아이들과 함께 우리도 공부를 했고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 책은 올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 저작물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중적인 글쓰기와 책 쓰기의 시대가 도래했다. 전문 작가나 소설가, 학자, 기자들뿐만이 아니라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주부들이 글을 쓰고 엮어서 책으로 펴내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해 알려주는 도서와 책 쓰기 강좌도 부쩍 많아졌다. '나도 잘 쓰고 싶다' '10년차 직장인 사표 대신 책을 써라' '당신도 책을 써라' '책 쓰기 꿈꾸다' '일생에 한 권 책을 써라' '이젠 책 쓰기다' 등의 책들을 서점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꾸준히 나오던 글쓰기 책과 달리 매년 1~2권 수준이던 책쓰기 지침서가 올해는 7종 이상 발간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나도 잘 쓰고 싶다
개인 블로그, SNS 등으로 인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좋은 글'에 대한 욕심과 동경이 많아졌다.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공교육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글쓰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정작 사회에 나와 각종 프레젠테이션이나 보고서 같은 것을 준비하며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경우도 많다. 최근 주요 신문사나 문화센터마다 글쓰기 강좌에 사람이 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의 최세라 팀장은 "글쓰기 도서 판매의 호조세가 시작된 지 2~3년 정도 된 것 같다"며 "최근 들어서는 책 쓰기에 관한 책을 이용한 강연과 출판 기획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전자책 출간 등 1인 출판이 용이해진 기술적인 변화도 개인들이 책 쓰기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교보문고는 최근 비전문 작가들을 대상으로 소량 출판을 해주는 POD(publish on demand·주문형 출판) 서비스를 시작했다. 최소 2000~3000권의 초판을 찍는 출판사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저자들의 글을 대상으로 전자책을 만들어주고, 소량을 인쇄해 독자들의 반응을 먼저 보고 대량 인쇄 여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김상훈 교보문고 디지털컨텐츠사업단장은 "지난 7월 시작해 지금까지 700종의 서적을 발간했다"며 "하루 10부가 팔린 책도 나왔는데 이런 책들은 모아서 정식 출판 절차를 밟고 있다"고 말했다. 장르 소설 쓰기에 도전하는 중년 남성들도 의외로 많다. 현재 교보문고에서 진행 중인 로맨스 소설 공모전에는 의사, 교사, 회사원 등 중년 남성의 응모율이 90%에 달하고 있다.
◇개인 '퍼블리싱(publishing)'의 시대
디지털 시대로 오면서 이제 뭔가를 쓰고 검색하고 엮고 형태를 갖추고 배포하는 행위는 일상적인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RHK(랜덤하우스코리아) 송병규 과장은 "자료를 모으고 사진을 붙이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편집해서 올리는 것 자체가 일종의 '퍼블리싱'행위에 해당한다"며 "꾸준히 개인적 글쓰기를 통해 블로그를 운영해오다가 출판사 편집자들의 눈에 띄어 작가로 데뷔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여행이나 역사 읽기, 미술 감상 등 다양한 분야의 숨은 고수(高手)들이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개인들이 자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된 것도 비전문가들의 책 쓰기를 용이하게 해주는 요소다. 여기에 외국어 실력만 뒷받침된다면 전문가 못지않은 자료를 모을 수도 있다. 출판평론가 표정훈 한양대 특임교수는 "책 쓰기에 있어서 자료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글의 노하우와 책의 목차를 정하는 노하우만 쌓이면 질(質)은 둘째치고라도 책을 엮을 수 있게 됐다"며 "최근 책 쓰는 방법을 소개해주는 책이 많이 나오는 것은 자료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 익혀야 할 에디터십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책 쓰기로 인생의 해답을 찾는 사람들
평균 수명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100세 시대'에 불안한 중년 이후를 대비해 살아온 인생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책을 써야 한다는 주장들도 나오고 있다. 50세 전후에 자신의 커리어를 종료해야 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는 개인들이 '책 쓰기 작업'을 통해 자기를 재발견하고 전문성도 쌓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1인 1책 주의'를 주장하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은 "직장인이라면 10년 이상 자신이 종사했던 분야에 대해 적어도 한 권의 책으로 남길 만한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며 "그것이 향후 퇴직 이후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구 소장 자신이 중년에 접어들며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정리하려면 일도 대충대충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직장 업무에서도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네이버 카페 '한국책쓰기코칭협회' 운영자인 김태광 비전연구소장은 "책을 쓰다 보면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일을 체계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점검하게 된다"며 "그런 과정을 통해 비전을 만들어 가는 것이 '기록의 힘'"이라고 말했다. 오병곤(45·IT업체 이사)씨는 마흔 살이 되던 2007년 IT 관련 첫 책을 낸 이후 지금까지 IT 관련 서적과 자기계발서 등 5권을 썼다. 그는 "대부분의 직장인이 전문가가 되고 싶어하는데, 학위나 자격증에 집착하기보다는 책 쓰기를 권하고 싶다"며 "일반인들 사이에까지 글쓰기 책 쓰기 문화가 정착되면 소통하고 공감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퍼져 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신동흔 기자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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