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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인문학, 과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10-01-19 | hit : 2166


노숙인도 인문학 공부하면 변화하던가요? - 아그리파(오마이뉴스 기자)

노숙인과 함께 하는 인문학 강의가 시작된 지 5년째다. ‘뜻한 대로’ 노숙인의 인문학적 성찰을 유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일부 언론과 시민사회의 관심을 유도하면서 ‘뜻하지 않게’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파생시키기는 했다.

아직 노숙인인문학의 성패를 논하기엔 이르다. 지난 5년간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가 속속 등장해 양적인 면에선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지만 그것을 질적 성과라고 말하긴 곤란하다. 인문학 강좌란 본시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분야이며, 그것을 목적하지도 않는다. 인문학의 본디 성격이 그러한데다, 특히 노숙인 인문학의 경우 성과에 집착하다간 자칫 애초의 의도와 취지마저 훼손시킬 수 있다.

노숙인인문학의 취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인문학이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에 대한 인문학 스스로의 의문에 복무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현실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치유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5년의 경험은 그러한 시도가 상당부분 유효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두 번째는 빈곤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인식을 일깨우는 일이다. 그간 빈곤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그야말로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빈곤을 경제사회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빈곤은 보다 총체적이며 구조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빈곤을 경제사회적 관점에서 ‘분배의 문제’로만 인식해선 안 된다. 즉 빈곤은 ‘분배의 문제’이기 이전에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관계란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관계의 산물이다. 사람과 사람의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따라서 빈곤문제를 인문학적 프레임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 그간 지체되고 방기되었을 뿐이다.

세 번째는 인문학을 통해 노숙인의 정신적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클레멘트 코스’의 설립자인 얼 쇼리스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들려주는 흑인 여죄수와의 대화는 듣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교도소를 방문한 얼 쇼리스가 흑인 여죄수에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다. "저희에겐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도 부자들처럼 박물관, 음악회, 미술관 등을 다니며 정신적 삶을 살았더라면...” 그말이 곧 얼 쇼리스로 하여금 홈리스(Homeless)인문학 강좌인 ‘클레멘트 코스’를 설립(1995년)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제도교육이 삶의 방편을 습득시키는데 주력해 왔다면 인문학교육은 삶의 의미를 고뇌하게 한다. 어찌 보면 편안한 삶을 살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단 밖으로 나온 인문학이 의미 있는 사회교육프로그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정신적 삶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살기 힘든 노숙인에게 "고뇌하고 또 고뇌하라, 고뇌한 내용을 글로 옮기라"고 말하는 노숙인인문학, 과연 어떤 결과들을 만들고 있을까.

필자는 지난 2005년에 설립된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인 성프란시스대학에 참여해 3년 동안 문학과 글쓰기 강의를 했다. 지금은 경희대학교로 소속을 옮겨 여전히 노숙인인문학을 진행하고 있으며 작년부턴 교도소 수형자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강의를 하고 있다. 아래에 적시한 두 개의 에피소드는 노숙인인문학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다.

#1.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해준 인문학수업

성프란시스대학 졸업생 야유회 때의 일이다. 늘 갖고 있는 의문이지만 한 번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하필 왜 인문학인가?”라는 질문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때 누군가 어눌한 목소리로 말한다.

“솔직히 저도 왜 인문학을 들어야 하는지 아직 모릅니다. 교수님들, 선배님들도 계신데 감히 제가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 얘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몇 년 전부터 아내에게 이혼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무능력한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내에게 며칠 전 난생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16년 동안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말을 하게 만든 게 바로 인문학 강의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줄곧 이혼하자고 보채던 아내가 그 한 마디를 듣고 부드럽게 변한 것 또한 놀랄만한 일이고 말입니다.”

#2. 노숙인 이씨의 용기와 도전을 보라.

IMF때 사업에 실패한 이 씨는 10년의 노숙생활을 하는 와중에 인문학강의를 들은 후 자활의 의지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그에게 어느 날 대형트럭 운전사를 구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차주를 득달같이 찾아간 이 씨는 다짜고짜 자신이 해보겠다고 자청했다. 문제는 그에겐 대형운전면허가 없었다는 것. 이 씨의 열의에 찬 눈빛을 본 차주가 운전면허를 딸 수 있도록 도와준 끝에 그는 결국 의정부와 울산을 오가는 힘들지만 그만큼 수익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찾아 자활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어느 날 이 씨가 필자를 찾아왔다. 술 한 잔 사고 싶다는 거였다. 그날 술자리의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자 충격이다. 인문학 강의시간에 읽었던 책들을 언급하면서 중요한 건 현재적 조건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와 용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마침 노숙인인문학 강의시간에 함께 읽었던 책의 글귀가 귓전을 울렸다.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니체,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저) 중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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