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사람들이 책을 찾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요즘 독자들은 어떤 특정 분야의 책과 함께하고자 한다. 출판전문가들은 ‘자기치유’(self-healing)가 2008년 출판 시장을 상징하며, 새해에도 자기치유의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은, 정치지도자들의 무능력과 이전투구, 사회적 갈등의 확산, 빈부격차의 심화, 해소되지 않는 청년실업, 자살자의 증가, 고사 상태의 문화시장 등으로 대중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할 상황에서, “이미 ‘성공’을 포기한 지 오래고,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사치일 뿐이며,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것에 몰두한다”고 말한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스스로 위안받는 자기치유를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점에는 자기치유와 연관한 책들이 눈에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다.
이상은 오늘의 사회 상황이고 독서 문화 현상이다. 그런데 이제 그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곧 ‘사람과 책’에 대한 깊고 넓은 문화적 성찰이 필요하다. 문화 변동은 매체 혁명과 밀접하다. 구술문화를 ‘시각화’(말하기를 구술-청각의 세계에서 시각의 세계로 이동시켰다는 의미에서) 또는 ‘정적(靜的)으로 영상화’한 문자문화의 경우도 그렇고, 텔레비전·영화·인터넷 등 동적(動的) 영상과 음향을 종합하는 ‘감각종합형 문화’의 경우도 그렇다.
이 모든 경우 매체 혁명은 문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미시적이자 거시적인 변동을 일으켜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미의 문제’다. 오늘날 인문적 성찰이 감각종합형 문화와 연관하여 끈질기게 제기하는 것도 의미의 문제다. 인문학의 활동 가능성은 의미를 전제하기 때문이며, 과학-기술의 성과를 일상화하는 현대문화가 의미에 대한 사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의미의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동적 시각화’ 및 ‘속도 제어’의 문제와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들 들어, 영화와 텔레비전은 동적 현실을 동적 영상으로 시각화함으로써 현실을 재현한다. 그러므로 총체적 현실 재현이라는 과정에서 시간의 흐름마저 시각화의 작업 안에 포함한다. 그 결과로 온 것은 의미 형성 과정에서 사유 주체가 속도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앞으로는 또 다른 문화 변동이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영화와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
반면 책을 읽을 때 속도를 조절하는 주체는 독자다. 어떤 문장을 음미하기 위해 천천히 읽을 수 있고, 어떤 쪽들은 빨리 넘어갈 수 있으며, 한 줄의 문장에 감동해서 그곳에 한참 머무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의미 형성을 위해 속도를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영화와 텔레비전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속도 조절의 주체는 수용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매체는 의미를 위해 속도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정해진 속도에 따라 진행하기 위해서 사유 주체의 의미 형성 과정에 무심하며, 오히려 자신의 시간 계획에 따라 진행하는 서사 구조 속으로 수용자가 몰입하기를 원한다.
인터넷의 경우 속도제어를 사용자가 맘대로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터넷의 바다는 그 자체가 ‘속도 기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여러 경로를 서핑하는 유저는 ‘의미’를 위해 멈춰 서 있기보다는 정보와 지식의 파도타기를 즐기려는 경향을 갖고 그것에 익숙해진다.
다시 ‘사람과 책’의 차원으로 돌아와 보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읽지 않는 순간들을 내포함을 의미한다. 의미 형성을 위해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들 말이다. 이 점이 독서에서 핵심이며, 책읽기의 묘미다. 위기의 시기는 삶의 의미들이 상실되는 순간들이 이어지는 시기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무에 빠지든가,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한다. 허무의 바람이 부는 시대에도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위치에 표표히 서 있으려 한다. 그래서 자신이 의미 형성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매체를 다시 찾게 된다.
이는 우리에게 독서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자기치유 목적의 책을 읽으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에게 ‘책을 읽을 때’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어떤 책도 사람한테서 의미 형성의 권한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다양한 책을 의미 있게 읽어야 할 때다. 자기치유의 목적을 드러내는 책은 오히려 의미 형성의 주체로서 독자를 방해할 가능성 또한 내포한다.
위기의 시대에 문화가 중요하다고 한다. 이는 문화를 깊고 넓게 보고 활용하라는 의미다. 우리는 디지털 영상·음향 문화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문자문화가 대중문화에서 아주 중요한 분야라는 것조차 잊고 있지 않았던가?
김용석 영산대 교수 [한겨레신문, 200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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